같은 영화를 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른 영화를 본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종종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넘어가게 마련이다.
너무 당연해서 안일하게 대처하는 꼴이랄까.
2.
어떤 이는 별 철학이나 사상이 없더라도, 심지어 개연성이나 당위성 마저 없더라도 감독이 말하는 흐름을 타고 편안하게 흘러갈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개연성이나 당위성이 없으면 감독이 하고자 하는 흐름 자체에 역겨움이나 멸시가 느껴져 더 이상 관람이 불가능해지는 이도 있다.
3.
그런데 가끔씩 전혀 겹칠 것 같지 않은, 아니 겹칠수 없을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즐겁게 관람했다는 영화들이 있다.
그 영화는 섞일수 없을 듯한 두 부류를 하나로 모았다는 점에서는 이미 성공작이라 부를만 할수도 있다.
하지만 명작이나 대작이라고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주저함이 뒤따른다.
4.
본인이 실제로 겪은 한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자라던 청소년-청년 시기에는 딱히 편하게 즐길만한 대중적인 문화 컨텐츠가 거의 없었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롭거나 클래식에 완전히 꼽혀서 생활비를 거기에 탕진할 각오가 된 경우가 아니라면 뮤지컬이나 발레, 혹은 제대로 된 클래식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기껏해야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비디오 테이프나 DVD를 빌려 보는 것이 다였다.
거기서 조금 더 빠져들 경우에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 등을 접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때 당시엔 애니나 만화, 게임 등을 즐기는 사람들을 오타쿠로 몰리는 시기기도 했다.
여튼 이미 영화는 볼만큼 봤지만 신작의 출시 속도가 내 감상 속도를 못따라주게 되어 주로 애니와 게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난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거지같던 군대에서 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스타쉽 투르퍼스'
'원초적 본능'으로 널리 알려진 폴 베호벤 감독이 '쇼 걸'로 폭망하고 나서 찍은 작품이었다.
사실 갑작스레 토요일 일과 후에 쉬고 있는 애들을 모이라고 하더니 영화를 보여줘서 이게 또 뭔 개짓거린가 하고 끌려가서 앉아 봤는데, 당시에는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영화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이 그냥 제목만 알고 관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군대 끌려가서 개같이 복무하는 중에 '투르퍼스'라는 단어는 내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거지같은 기분으로 째려봤다.
근데 이게 분위기가 뭔가 예상과 달리 통쾌한 부분이 있었다.
내용은 주인공은 군대에서 별 거지같은 상황과 맞닥뜨리면서 위기와 갈등을 이겨내고 외계 벌레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별 내용은 없고 뻔한 클리셰에 액션과 피튀기는 SF효과를 섞었는데 당시 크게 유행하던 민족 전통 놀이 '스타 크래프트'의 테란과 저그의 전투를 실사화한 것 같은 영상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주인공이 전형적인 전쟁 영웅물의 성장을 그대로 따라가는데 이게 곱게곱게 그대로 밟는 느낌이 아니란 거다.
마치 '그래 ㅆㅂ 너넨 이따위 병신같은 무뇌 미국만세 영웅을 좋아하지?' 하고 관객들을 우롱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통쾌했고 이 부분에서 섞일수 없는 관객이 모두 좋아한다고 다 명작이라 부르기엔 조심스럽다는 얘기를 꺼낸 것이다.
5.
극소수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시선에서 이 영화를 봤고 즐겼고 감독과 함께 비웃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클리셰에 취해서 영웅만세를 외치기라도 할 듯(아마 애들 뇌가 많이 단순화 된 군대였기에 더 그랬을 거라 유추한다)한 광적인 반응으로 토요일 저녁 쉬는 때에 억지로 끌려와 얼굴을 구기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진짜로 함성을 지르며 광분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군복무 스트레스를 이렇게라도 풀어야 했기에 더 과장되게 표출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여러 부분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동시다발적으로 함성을 지른 부분이 있었는데 기억나는 부분은 딱 한군데였다.
거의 마지막 엔딩에 적 보스 벌레를 잡았는데 벌레를 만지며 의사소통이 가능한 배역이 그 벌레를 만지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대사를 읊을 때였다.
극소수에 해당하는 나와 내 친구는 정말 웃음을 참지못하고 빵 터뜨렸는데 그 때 대다수가 영화 속의 병사들처럼 함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영화 속의 대사와 현실의 반응이 겹쳐서 나와 내 친구는 정말 입대 후 최고로 강력하고 오래 웃었던 기억이 있다.
6.
함성을 지른 이들과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매우 다른 시선을 갖고 있었다.
각기 다른 시선을 택한 이유가 같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다른 선택을 했고 다른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이들에게 각각의 관람평을 물어보면 분명히 다를 것이다.
'재미있게 봤다'는 부분은 같을 수 있겠지만 그 외 대부분은 전혀 다른 얘길 할 것이다.
대중문화란 결국 문화의 일부이지만 결국 자본주의 상품이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문화'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문화'는 굉장히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에 붙이는 낙인같은 것이다.
물론 점차 거대 자본이 쏠리면서 겉으로 보이는 퀄리티는 매우 상승하기도 했고, 흔히들 말하는 '순수 예술' 분야가 자본주의와 결탁하면서 대외적으로나 순수지 가장 썩은 모습을 보이는 시기와 크로스되며 구분 자체가 모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No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끄적임 (1) | 2024.04.20 |
---|---|
6.25전쟁 70주년 행사 - 영웅에게 (0) | 2020.06.26 |
위안부 문제 최종타결? (0) | 2015.12.28 |
디아블로3가 여자였다면 (0) | 2012.05.23 |
세 명의 텔레마케터와 한 명의 회사원 (0) | 2012.05.04 |